2013년 10월 3일 목요일

금호창작스튜디오 8기 입주작가전 비평워크샵 (2013년 10월5 일 금호미술관)

금호창작스튜디오 8기 입주작가전 <공유된 고립>(2013.0926~1006 금호미술관)의 부대행사 '비평 워크샵' 소식.
** 8기 입주작가는 김민경 유목연 이예희 임소담 정석우 정혜정 최송화 황수연 허수영.
이 가운데 내가 담당한 작가 셋(김민경, 최송화, 황수연)에 관한 짧은 촌평은 아래에. 

♦  비평워크샵:
   시간: 2013년 10월5일(토) 오후 2~5시
   장소: 금호미술관 3층 세미나실
   비평가: 반이정(미술평론가) 이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조주연(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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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한 작가 촌평. 지문에 적힌 숫자는, 1은 작가노트를 참조하지 않고 본 첫인상 요약, 2는 작가의 해설을 요약한 것, 3은 이후 개선 방향에 대한 짧은 제안


최송화 : 생략, 반어, 최소화로 드러나는 것.


1.
화면 위로 손쉬운 단서가 놓이는 건 비평이나 관람 모두에게 유익하다. 제작자의 본래 의도야 어떻건, ‘자연-인공의 대비’ ‘대상을 지워서 대상의 존재를 반어적으로 강조하는 노출 방식’ ‘최소화 된 붓질’ 그 결과로서의 ‘여백’ 따위는 관람과 비평에게 실마리를 주는 괜찮은 회화적 모티브들이다. 최송화의 작법은 주어진 기성 풍경에서 일부를 발췌해서 자기 풍경화로 재구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인공 축조물의 기하학적 여백 처리 때문에 노출된 초록색 자연 풍광보다, 사라진 건물의 존재감을 역설적으로 시위하는 풍경처럼 읽힌다.
비닐 위에 먹지를 댄 드로잉도 빈 여백으로 반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점에서, 표현을 최소화 시킨 것으로 보였다. 인공물이 현대적 도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여백과 최소화된 붓질로 재현하는 게 작가의 의중 같기도 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확정할 순 없어도, 표현 기법을 주목하게 되는 작업이었다.

2.
관찰을 통해 도시의 삶에서 산과 녹지가 휴양의 지표인양 흔히 인용 되는 점에 착안했다고 한다. 이런 관찰은 건물과 녹지가 한데 뒤엉킨 풍경을 촬영하거나, 산세가 고층 건물에 의해 가로막힌 풍경 사진이나 혹은 포털 사이트 이미지 검색으로 한국 가정의 실내 장식에 꽃 패턴으로 사용된 여러 범례들의 수집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도심 한가운데 자연을 인위적으로 강조한 사례(ex. 홍제천)에 대한 경험이 이와 같은 작업을 밀어붙인 동기였던 모양이다. 인공폭포가 조성된 홍제천이나 난지공원의 조경에 대해선 작가노트에서 ‘위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현대적 삶에서 유린된 자연 생태를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한국의 토건 정책을 위장으로 풀이한 것이리라. 대등한 비유일 순 없어도, 인위적으로 생활공간에 자연 조경을 심어 넣어, 차츰 사라져가는 자연의 이상주의를 부풀리는 항간의 정서는, 이국 취향을 충족시키려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이나, 현대적 삶을 가상현실로 풀이하는 시뮬라크르 이론을 연상시킨 부분도 있었다.

3.
제작 연대순으로 작업 진행을 살펴본 결과, 자연 경관을 강조하려 애쓴 도시 생활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그런 실상을 지목하기위해서, 실내외에서 무분별하게 인용되는 ‘자연vs인공’의 대조가 돋보이는 자료를 수집했다. 실제 도시의 삶에서 자연은 소외되어 있지만, 자연 경관만 화면에 남겨서 소외된 자연이 반어적으로 강조되는 방식을 썼다. 다만, 상대적으로 검색엔진으로 일반적 가정의 벽장식을 다룬 후반 작업(2013년)은 초반 작업의 연장으로 보긴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는 점. 반복되는 여백의 화면이 동어반복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점 등은 극복되어야할 부분 같았다.
‘도심에서 관찰되는 흔한 인공적 자연물에 대한 불편함’(작가 노트 재편집)이라는 단서를 보다 선명한 쟁점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방식으로 다룬 주제라는 얘기는 아니다. 정치적으로 쟁점화가 관심ㅇ 아니라면, 이제까지의 방식을 재미있고 도드라지게 만드는 대책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또 시뮬라크르 현상이 시뮬라크르에 중독된 사회 구성원의 묵인에서 비롯된 만큼, 시뮬라크르에 대한 집단 중독에 방점을 둔 작업을 하면, 본래의 취지를 강화할 뿐 아니라 일관성도 유지하게 될 것 같다.

 풍경 Landscape (홍제교 7.30)_캔버스에 아크릴,바니시,미디움_160cm x 130cm_2010

 동경(憧憬)_비닐 위에 (먹지)드로잉_ 285cm x 220cm _2012-2013



(포털사이트 네이버 이미지 검색-거실단장)_29.7cm x 42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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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연 : 팽팽한 긴장, 느슨한 균형, 사물의 주관화


1.
A4용지, 단색 장방형(長方形), 최소화된 구조. 단순화된 첫인상은 비평과 관전을 위한 여백이기 쉽다. 1.4142:1의 비율을 지닌 A4용지는 서류의 국제 표준인데, 그 때문에 인류의 사유를 담는 구체적인 규격처럼 느껴지며, 때문에 거역 불가의 절대 규격이 바로 A4용지이다. A4용지의 타불라 라사(채워질 여백)를 연필자국을 채워서 무력하게 만든 점, 연필자국의 반복으로 팽팽한 표면이 헐렁하게 늘어난 점, 그것이 결과적으로 모노톤 미니멀리즘의 느슨한 균형감처럼 수렴된 점이 황수연 작업의 원점인 것 같다.
사물의 외형을 유지시키되, 그것의 본래 용도를 무력화 시켜서 자기 사물로 만드는 것. 이것이 황수연의 원점 같고, 연장된 다른 작업에서도 유사한 혐의를 찾을 수 있었다. 하나의 테니스공에서 펠트천을 뜯어내어 외형상 대등한 두 개의 공으로 분리/공존시킨 설치물 <전부 All>(2010)도 소재(테니스공)를 자기 사물화한 것이리라.

2.
무형의 언어 표현보다 유형의 접촉 면적을 통한 의사소통을 신뢰함. 작가 노트를 압축하면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언어를 빌리지 않고도 불완전하나마 사물의 성질을 통해 대안적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는 작가의 믿음과 연관될 것이다. 선택된 사물과 작가 사이의 밀착된 관계/접촉을 창작의 원점으로 두는 것 같았다. “사물에 매달리려면 나에게는 말이 필요했다. 그러나 말은 감각을 묘사할 뿐 경험할 수는 없다.” 소설가 팀 파크스의 이 고백을 읽으면서, 언어 의존도에 편중된 직종 종사자로서, 실재 체험을 고립시키는 언어의 본질을 간파한 문장처럼 느낀 적이 있다. 언어란 의사소통의 대부분을 유능하게 수행하지만, 인체 접촉을 통해 재현되는 고유한 의사소통의 영역 역시 분명 존재할 것이다. 연필자국으로 표면이 팽팽해진 종이표면(일련의 <A4 드로잉>의 경우)이나, 생달걀에 정교한 구멍을 내어 샤프심을 관통시킨 설치물 <신뢰>(2010)나, <악기를 닮은 조각>(2013)은 사물과 작가가 맺는 관계가 기본 구조의 범주 안으로 팽팽한 균형감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3.
이성보다 인체 접촉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태도는 창작가의 일반론이라고 나는 평소 믿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황수연은 재현의 대안적 화술을 우연히 구상하는 것 같다. 제작 공정에 대해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작업들, 최소한의 시각적 단서만 존재하되 선명한 서사의 흔적은 지우는 점, 주관적으로 변형된 사물을 던지되 해석의 지평은 느슨하게 열어두는 점(하지만 멋대로 해석하면 안됨) 등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곧잘 단조로운 사물로 귀결되는 작업 양상이나, 사물과 작가가 맺는 주관적인 관계가 제작자의 취지야 어떻건 60년대 미니멀리즘 코드인양 오인되지 않게 하려면, 조형적 농담의 유사 사례를 조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마 전적으로 발단은 다를 테지만, 사물의 변형, 대상과 주체(사람) 사이의 밀착, 팽팽한 긴장감, 그 모두가 결과적으로 조형적 농담으로 귀결되는 점에서 에르빈 부름(Erwin Wurm)의 작업 일부가 떠올랐다. 작가의 미학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참조는 될 것 같다.



 a4 drawing,연필 종이 ,가변크기

 All 전부 , 테니스공 ,가변크기 ,2010



Trust 신뢰  ,날달걀 , 샤프심 ,가변크기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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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 아주 오래된 반미학의 사유화


1.
서로 무관한 기성 오브제들이 가지런히 배열되면, 전면화 된 화면이 만드는 시각적 재미와 함께 오브제 수집에 얽힌 스토리텔링을 추정해 보게 된다. 아카이브 예술이 통용되는 방식이 흔히 그러하듯이. 이런 작업의 맹점은 개인의 사연으로 구성되는 탓에 주관적이고 지루하기 쉽다. 느리게 재생되는 흑백 영상물 <Ordinary Exposing>연작이 짧은 러닝타임에도 길게 느껴진 까닭은 그런 배경 때문이리라. 반면 해체와 재조립을 통해 외관상 매우 신속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하지만 완성까지 소요된 제작 시간은 훨씬 길었을 테지만) 작업의 양상은 작가가 속한 세대 정신을 읽는 단서로 읽히기도 했다. 이미지와 소비재가 밀려드는 세상에서, 흔해빠진 이미지와 소비재 과잉을 레디메이드 소재로 역이용하는 시대정신.

2.
일수(日數)를 기록한 작업들- <289days>(2010) <92days at W1W 6DN>(2012)-은 작가나 지인들의 일상사에서 사용된 오브제들의 집결로 구성된 작업이다. <289days>은 개인의 역사를 오브제로 진술하는 것이어서 더욱 주관적인 일지에 가깝다. <92days at W1W 6DN>는 세 명의 친구들이 사용한 오브제를 작가가 재구성한 설치물이다. 이외에 작가가 천착하는 기준점은 인습적인 오브제를 비일상적으로 변환하는 것이란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미세한 차이를 찾아내서 일상의 진부함을 우회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3.
김민경의 작업을 정치 예술로 규정할 순 없을지언정, 오늘날 예술이 정치적 언급에 관여할 때, 가능한 운신의 폭을 볼 수 있는 작업 같았다. 단조롭게 접근하면 유사한 선례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버려진 오브제의 재활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거나, 소비재에 예속된 생활에서 탈피하려고, 소비재의 본래 용도를 전용하는 무수한 선례들이 1960-70년대께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아르테 포베라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 그것인데 두 운동의 등장 시기가 일치하는 건 인습으로 굳은 모더니즘이 종결되는 시기가 그때여서일 것이다. 메시지의 선정성과 선명성은 이들과 같지 않으나, 꼭 비유해야 한다면 김민경의 작업 연보는 아르테 포베라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비록 70년대 초 종결했어도 고유한 방법론인 전유(detournement)는 2000년대에도 문화훼방(culture jamming)으로 명맥을 이어갈 만큼, 전유는 동시대 시각예술가에게 유능한 조형적 저항 기술로 애용된다. 특히 비제도 시각문화를 지향한다면 더더욱. 제도 예술과 비제도 시각예술의 중간에 서서, 인습적 창작이나 제도 예술계의 관행 속으로 투항하길 원치 않는 작가라면 두 선례의 중간지대는 자연스런 기착지일 수 있다. 김민경의 작업 연보는 21세기 문화훼방의 농담과 필시 한줄기에 놓이지만, 문화훼방의 메시지가 바깥을 향한다면 동일한 메시지여도 김민경은 훨씬 자기 유희적이라는 점에서 둘은 멀리 갈라선다. 김민경의 작업은 사적 고백이 적을 따름이지, 다매체를 체험한 세대가 내놓을 수 있는 일기에 가깝다. 관건은 일상에서 개인이 발견하는 차이들도 반복이 거듭되면 효과는 반감되게 마련이다. 그것을 사적인 즐거움으로 한정한다면 모르겠는데, 스토리텔링과 저항의 방법을 지금보다 보강하길 바란다면, 동지를 만나 협업하거나 공동작업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건 어떨까.   

 289days- Mixed Media-2010

92days at W1W 6DN- Installation with Sound-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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