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0일 금요일

0129 세비야의 이발사


1월29(목) 16시30분. 롯데시네마 건대 <세비야의 이발사 THE BARBER OF SEVILLE>(2014) 시사회.

별점: ★☆ 





연전에 극장에서 봤던 뉴욕 메트 오페라 녹화(The Met: Live in HD 엮인글)에 이은 또 다른 오페라 공연의 극장 상영작이다. 이전에 록그룹 U2의 라이브를 영화로 제작한 작품을 본 적이 있고, 메탈리카의 라이브를 극영화로 편성한 '스루 더 네버'도 있었다. 작년 말에는 빌리 엘리어트의 뮤지컬 라이브를 영화로 제작한 걸 본 적이 있다. 희극배우 채플린을 현대무용으로 다룬 '모던 발레 채플린'마저 영화로 제작되어 스크린에 올려졌다.  

이번에는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의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라이브를 녹화한 영화를 봤다. 영화 상영 직전에 수입/배급사 대표로 보이는 분이 무대에 올라 근래 늘고 있는 이런 부류의 라이브 영화들을 '이벤트 시네마'라고 부른다고 설명하더라. 영화는 실제 오페라 공연처럼 중간에 15분 간 인터미션이 있었다. 

연기와 성악이 집중되는 정중앙 건물이 회전이 인상적인 무대장치인데, 건물의 회전에 맞춰 출연진들이 이동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이 장면이 가장 역동적이다. 고전적 스토리텔링이 대개 그렇듯 남녀의 연정과 오해와 질투를 주된 테마로 삼고 있는데, 말도 안되는 변장으로 상대방을 속이는 수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도 고전 답고, 관객은 볼 수 없는 메모지에 이야기의 실마리를 담고 있다는 설정도 고전답다.  위기를 탈출시킬 만한 창의력이 돈만 주면 살 수 있다는 발상이나, 높은 신분의 남성을 향한 선망을 드러내는 시놉시스나, 해피엔딩을 결혼으로 귀결시키는 사랑 이야기 따위는 세속주의에 대한 그 당시의 진솔함의 표현 같기도 했다.

집에선 오페라를 대사에 무지한 채로 듣곤 하는데, 자막이 있는 이런 영상을 한번 보거나 자막이 나오는 실황 공연을 보고나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증진된다.  어제 영화 <세비야의 이발사> 시사회를 보러가기 직전에, 전체의 선율을 익혀두려고 집에 있을 때 '세비야의 이발사'를 2번 정도 듣고 나왔다. Teatro Regio Di Parma의 2005년 라이브와 Teatro alla Scala Milano의 1999년 라이브인데 전부 유튜브에 풀 영상이 올려져 있다. 


* 배우의 캐릭터와 미모가 미디어 작품에서 갖는 비중을 새삼 절감했다.

* 흔히 수입/배급사 시사회는 참관인의 모습에서 익숙함이 느껴지곤 하는데, <세비야의 이발사>는 일반 시사회 같이 평범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대체 누굴 초대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기사를 찾아보니 클래식 동호회 회원들도 일부 초대한 모양이다. 내가 앉은 열에 왠 중년 남성은 극장안에서 촬영할 때 '찰칵'소리가 나는 핸폰 카메라로 스크린을 태연하게 무수히 촬영하고 앉아있었다.  인터미션 때 내가 주의를 줘서 2막부터는 그런 황당한 일은 다시는 없었지만.  시사회를 자주 보러다니다보니 별 해괴한 관객도 만난다. 

2015년 1월 29일 목요일

0127 망원동 인공위성 ★★★

1월27일(수) 16시30분. 왕십리CGV  <망원동 인공위성 The Basement Satellite>(2013) 시사회.

별점:  





시사회 입장에 앞서 러닝 타임이 108분인 걸 보고, 분량이 왜 이렇게 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송호준이 개인인공위성을 2013년 발사하기까지의 여정을 줄곧 추적하는 시나리오를 영화를 통해 확인한 후에야 그 긴 분량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편집이 긴 건 맞아보인다. 왠고하니 개인위성을 쏘아올리는 개괄적인 여정이라면 세간에 널리 알려짙 터라, 내러티브를 동어반복해서 확인하는 기분이 들기 쉽다. 내가 시사회에 함께 데려간 지인에게 영화를 다 본 후에 소감을 물어보니까, '솔직히 말하면, 너무 지루했어요'라고 털어놓더라. 나는 그렇진 않았는데...  

시사회장에서 받은 두툼한 보도자료를 보니, 송호준이 2013년 최종 발사에 이르기까지, 2008년 OSSI 홈피를 만들어 개인인공위성 발사에 착수했고, 2010년 1/n라는 잡지에 개인인공위성 프로젝트 관련 기사가 소개되어, 티셔츠 1만장을 팔아 발사비용 1억원을 충당한다는 내용도 공개했단다. 그 후 발사 지연과 티셔츠 판매 부진에 따른 우여곡절을 겪고 2013년 결국 발사하게 된다. 

흔히 인공위성하면 우주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안테나가 달린 비행체를 떠올리기 십상이므로, 한 손에 들리는 송호준의 '큐브형' 개인인공위성과 헷갈리면 안될 게다. 

<망원동 인공위성>은 '개인인공위성 발사'와 관련해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스토리를 영화로 재구성한 점에서, 참신한 뒷얘기를 기대할 순 없다. 영화가 포스터나 보도자료에 자주 인용한 '꿈'과 '희망'을 전달하는 영화이긴 어렵다. 왜냐하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5년여의 준비를 거쳐 최종 발사에 이르는 주인공의 스토리는 보통 사람에게 '반전의 현실감'을 줘야할 텐데 그렇지 않다. 개인인공위성 프로젝트 발상은 '비현실적인 공상을 현실로 이행하는 태도'에 높은 점수를 주는 예술계의 정서에는 호소할 여지가 크고, '남다른 기행'을 수집하는 매스미디어에도 큰 호소력을 지닐 테지만, '꿈가 희망을 찾는 좌절한 사람들'에게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페이소스를 주긴 어렵다. 요컨대 대단치 않아 보이는 티셔츠를 1만장이나 팔아서, 발사비용을 충당하겠다는 발상도 꿈과 희망을 기대하는 관객에겐 호소력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의 요소여서, 극적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 

영화 후반부에서 이런 크레딧이 뜬다. "탑재된 송호준의 인공위성은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온전히 제 기능을 수행하는 인공위성을 탑재하진 못한 셈. 이런 공학적 불완전성은 이 영화가 '꿈 과 희망'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어느 남다른 기인에 대한 전기로 봐야 한다. 영화 속에 삽입된 어느 방송사와 송호준의 인터뷰 음성을 들어보면, "쏘아올린 인공위성은 어떤 일을 수행하게 되나요?"라고 묻는 인터뷰어의 질문이 나오는데, 뒤에 나와야할 답변이 영상에서 사라졌다. 예술계에서 송호준 개인을 평가할 때 전례없는 기행에 높은 점수를 준 것이기 때문에, 인공위선의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는 공학적 실패는 문제가 아닐 게다. 그래서 송호준을 바라보는 비평적 태도와, 그를 다룬 다큐영화 <망원동 인공위성>에 대한 평가는 구분될 수 밖에 없다. 

영화의 긴 러닝 타임 내내 스크린 위에 주인공 송호준의 모습만 집중적으로 편집한 것도 패착이라고 보는데, 약한 스토리텔링을 주인공의 모습으로 눙치는 것 같기 때문이고, 반복되는 모습도 긴장감을 약화시킨다. 


* 송호준의 외부에서 행한 강연 영상을 몇번 본 적이 있는데, 미디어 시대 동시대 작가들에게 가장 유리한 능력인 프리젠테이션 능력을 꽤 갖췄더라. 더구나 미술계에만 예속되지 않고 다른 분야 관계자와 맺고 있는 인맥도 그에게 남다른 동력이 될 것 같다. 

2015년 1월 24일 토요일

코카콜라 + 솜사탕

1월24일(토)

코카콜라병의 로고 변형의 재치 + 외국 관광객으로 넘치는 명동 노점에서 본 다채색 솜사탕 




0123 서유기 : 모험의 시작


1월23(금) 16시30분. 롯데시네마 에비뉴엘 <서유기 : 모험의 시작 Journey to the West: Conquering the Demons>(2012) 시사회.

별점: 보류 









해외 비평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줬기에, 관람을 결정했는데 막상 영화의 어떤 점에 후한 점수를 매겼는지 보는 내내 이해하기 어려웠다. 2012년에 제작된 영화임에도 CG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조악했고, 스토리텔링도 참신한 구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코미디도 유치했다. 동시대미술 중에 다변화된 욕구를 드러내려고 전에는 보기 힘든 방법론을 동원하는 작품들이 있다. 이런 작품 앞에서 관습적인 감상과 평가법은 길을 잃게 마련이다. 주성치의 이 같은 영화도 영화를 평가하는 종래의 잣대로 대하기 힘든 변종이 아닐까하는 생각, 또 그런 변종이 영화계에 계속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별점 보류. 

일부 서구 비평사이트에서 주성치의 신파적 코미디물에 후한 점수를 준 요인이, 큰 체구를 지닌 킹콩같은 자신들에게 친숙한 서구적 괴물 캐릭터를 동양적 판타지물로 재구성해서 재현한 점과, 신파적 코미디물을 이국적 취향으로 이해해서인건 아닐까? 
<강남 1970>시사회 때도 그랬지만, <서유기 : 모험의 시작> 시사회장에서도 영화에 출연한 나지상의 국내 팬클럽에서 관객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더라. 

영화에 대해 오해를 하고 간 게, 나는 <서유기 : 모험의 시작>이 '서유기' 자체를 영화적으로 각색한 영화인줄 알았는데, '서유기'에 관한 프리퀄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잇는 후속작도 준비 중인 모양이다.  

2015년 1월 21일 수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파괴된 인체의 美 (씨네21)

* <씨네21>(989호)의 '반이정의 예술판독기'114회.



파괴된 인체의 



상좌. 신타로 카고의 그로테스크하게 파괴된 인체 그림
상우. 조엘-피터 윗킨입맞춤, 1982
하. 멜버른 지하철이 배포한 <어리석게 죽는 방법>에 등장하는 사고를 당한 캐릭터들 2012


아름다운 이 사랑스럽고아름답지 않은 이 사랑스럽지 않다네.” 고대 그리스 결혼식에서 축가로 사용된 시구의 일부다고대 세계에서는 미와 추를 각각 선과 악을 표상하는 개념으로 썼다미의 본질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미학에 관한한 지금도 이견은 적을 것이다그렇지만 불쾌하고 흉한 감각을 미적 핵심으로 탑재시킨 예술이 분명 존재할 뿐만 아니라 추의 미학을 추종하는 열광적인 마니아도 많다고전 미학에 반하는 이른바 추의 미학은 특히 근대의 탄생과 함께 넓은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다.

빅토르 위고는 흉한 얼굴과 기괴한 육체를 지닌 노틀담의 꼽추라는 총체적인 추의 캐릭터를 예술 무대의 주인공으로 세웠으며위고의 발명품을 계승한 후발주자들은 추의 미학을 밀어붙이기 위해 인체를 주저없이 절단 냈다.

일본 만화가 신타로 카고가 만든 캐릭터들은 절개되고 해체된 인체로 태연히 살아 숨 쉰다멜버른 지하철이 지하철 사고를 예방하려고 만든 국민 홍보 애니메이션 <어리석게 죽는 방법 Dumb ways to die>에는 무모한 실수로 목이 잘리거나머리가 터지거나감전으로 온몸이 잿더미가 되거나피라냐 물고기 떼에 뜯겨서 하반신이 사라진 캐릭터들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열차 사고에 주의하라는 메시지를 유유자적 전한다끔찍한 사고 장면을 표현했지만이 애니메이션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이 알 수 없는 중독성의 원인은 잔혹한 현장을 유쾌한 캐릭터로 여과한 탓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검열로 일상에선 보기 힘든 참상을 직설적으로 묘사해서 후련함을 준 점도 무시 못할 거다.

파괴된 인체의 미를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는 것과 달리여과장치가 없는 사진에 그것을 담는다면 충격의 강도가 비할 바 없이 클 것이다그럼에도 절단된 사지나 목 없는 시체를 피사체로 다루는 조엘-피터 윗킨의 사진은 흡인력을 지닌다이처럼 파괴된 인체를 재현하려는 욕구는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의 <절단된 사지 연구>까지 추적할 만큼그 계보가 든든한 편이다.

조엘-피터 윗킨이 그로테스크하게 변형시킨 인체를 자신의 화두로 정한 계기는 그가 유년시절 목격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목이 잘린 시체를 본 경험에서 비롯된다기이한 느낌 혹은 두려운 낯섦을 뜻하는 언캐니에 대해 프로이트는 억압되었던 것이 복귀할 때의 감정이라고 풀이했고그 억압을 거세공포 같은 자신의 성욕 이론과 연결시켰다그래선지신타로 카고의 절개된 인체의 소녀나조엘-피터 윗킨이 연출한 여러 시체 사진은 죽음의 미학을 표방하면서도변장한 에로티즘을 숨기고 있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2015년 1월 20일 화요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컴터 사용 중이던 오전, '윈도 8.1'(?) 업데이트 하겠냐는 안내창이 뜨길래 별 생각 없이 눌렀다가 머리 뚜껑만 열렸다.

컴터 지식이 부족했던 터라, 수 분 이내 업데이트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왠걸 거의 2시간 동안 컴터에 손도 못 댄채 시간을 보냈다. 업데이트 하나가 끝나면 또 다시 '추가 항목 설정 중'이 뜨고, 나중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라는 엄청 오랜 안내문이 다시 떴을땐 자포자기 상태. 오후에 예약 잡아둔 보라매병원 치과에 가기 전까지 대략 가닥을 잡아둘 원고가 하나 있었는데 두 손 놓고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Motown에서 발매된 Grover Washington Jr.의 음반이며, 전에 안 듣던 LP들을 연달아 꺼내 들으며 머리 열을 식혔다. 









 

2015년 1월 16일 금요일

Fiesta AK 201

올해 1월7일 턴테이블을 Pro-ject 1-Xpression Ⅲ로 교체하고, 1월10일 앰프 Musical Fidelity A1를 수리해서 받아온데 이어, 오늘 북셀프형 스피커 Fiesta AK 201의 중고 매물을 구입해서 작가 정재호를 통해 건네 받았다. 이제 내가 쓰던 고장난 턴테이블은 버릴 예정이고, 오늘까지 사용한 스피커 Boston acoustics HD10는 오디오 교체 과정에 줄곧 도움을 준 정재호에게 넘겼다. 우퍼가 찢어진 스피커여서 물물가치는 낮지만 장식용으로 갖고 있느니 활용할 줄 아는 분이 가져가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드렸다. 


북셀프형 스피커여서 부피가 작다.  LP재킷과 내 폴더폰과 비교해서 보시라고.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 러버덕 (씨네21)

* <씨네21>(987호)의 '반이정의 예술판독기'113회.



커다랗게 부푼 일회성 감동


좌. 바람이 빠진 채 석촌 호수에 떠 있는 러버덕 2014
상우. 폴 매카시똥덩어리 2013
하우. 제프 쿤스노란색 풍선개(Balloon Dog Yellow) 1994-2000



풍선은 놀이문화의 유아기적 아이콘이다파티의 분위기를 풍성하고 팽팽하게 부풀리는 풍선은 소모적인 파티용품의 1번 타자로 항상 등판한다화려하고 풍성한 풍선의 외관은 바람이 빠지는 숙명 때문에 왜소하게 축소되는 최후가 기다린다반영구적인 박제화로 가치를 상승시키는 예술과는 생리적으로 함께 가기 힘든 재료가 풍선인 셈이다.

그렇지만 헬륨가스를 몸에 넣은 풍선은 자신을 공중에 부양시키는 우월한 위치 때문인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들뜨게 만든다.속이 텅 빈 풍선은 질량 대비 가격 대비 가장 큰 스펙터클을 만들 줄 안다비록 총 중량이 1톤에 달한다지만 크고 노란 고무 오리 러버덕이 공공설치미술의 지위로 전 세계를 순회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부풀린 큰 몸통에 비해 그 안이 텅 비었다는 사실 때문에 시각적으로 위압적이되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주지 않으며팽창한 표면의 윤기 역시 호감을 일으킨다라텍스 고무 재질의 표면은 외압에 쉽게 터지거나 흐물흐물 해지는데이런 풍선의 초라한 조건은 연민을 유발하거나 바니타스 같은 일장춘몽의 매력을 더한다.

황당하게 큰 오리인형을 호수에 띄우거나터무니없이 큰 똥 덩어리를 넓은 들판에 재현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풍선이었기에 가능한 미학적 실험일 것이다중국 베이징에선 러버덕을 사실상 표절한 금두꺼비 풍선 인형 러버프로그(Rubber Frog)을 위위앤탄공원 호수에 띄웠다러버덕이 누리는 질량 대비 가격대비 효과의 성공적인 선례가 다양한 표절 풍선 인형을 계속 양산시키고 있다.

풍선은 짧고 강한 시각적인 충격을 던지고 종적 없이 사라지곤 하는 동시대미술의 한 경향을 가장 저렴하게 구현 시키는 재료다그래서 일부 미술가들들이 선호하는 재료가 되었다풍선의 일장춘몽을 영구적으로 박제화 시키는 사업가적 예술가도 등장했다팝아티스트 제프 쿤스는 풍선의 위력을 차용하되상품의 보존 가치를 보장받으려고 스테인리스로 풍선의 재질감을 흉내 냈다.

풍선이 동시대 시각예술의 유의미한 재료로 부상한 배경에는 일회성 유희가 현대적 삶의 공식처럼 굳어간 사정도 작용할 것이다호수에 떠 있는 커다란 오리인형은압도하는 거대한 아름다움을 뜻하는 숭고미가 현대 사회에서 희극적으로 변형되어 등장한 사물 같기도 하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2015년 1월 14일 수요일

0113 강남 1970 ★☆

1월13일(화) 14시. 왕십리CGV  <강남 1970>(2015) 시사회.

별점: ★☆







'별점+20자평'으로 영화 품평하기엔 제약이 많다는 걸 알지만, 이 방식으로 간결하게 정리한 후 잊고 싶은 영화는 있고, 아니 많은 법이다. <강남 1970>이 바로 그런 영화이고, 기대에 미치질 못한 영화다. 장황하게 논평할 필요가 없다.  

시나리오는 안일하고, 연기는 수준 이하이고, 결말은 식상하다. 캐릭터는 배우들의 지명도에 의존하는 모양새인데, 주연을 포함해서 캐스팅이 영화와 언밸랜스하다. 

시인 유하가 연출해서 주목을 받은 전작 <말죽거리 잔혹사>의 점수까지 깎아내리는 느낌. 유하가 강남 시리즈를 이미 시도했던 전례가 있으므로,  이 영화가 근래 대중문화 전반에서 일고 있는 복고열풍을 등에 업으려는 낮은 꼼수는 분명 아닐 테다. 그렇지만 <강남 1970>은 1970년대 한국사회의 미숙한 근대성을 낡은 간판이며 세탁소 풍경이며 그 당시 유통된 공산품들의재현으로 값싼 향수에 호소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서너차례 화면 속에 등장하는 정사신도 B급 에로물 같아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다. 당시 권력 실세들의 과도하게 권위에 찬 말투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앞서 연기자들의 연기력을 문제 삼았지만, 이 영화에선 '느끼함' '잔혹함' '권위적임' 등을 '느끼하고' '잔혹하고' '권위적으로' 연기하려고 들 뿐이다. 리얼리티가 없고 자연스럽질 않다. 

또 하나 봐주기 안스러운 건, 영화의 몇몇 코드는 1970년대 서구에서 제작된 <대부>를 연상시킨다는 거다. 여동생을 구타한남편을 찾아가 패주는 <대부>의 첫째 소니의 분노나, 결혼식과 콜레오네 패밀리의 예상못한 반격이 교차편집된 <대부>의 마지막 장면이 이 영화에선 상견례식과 반격을 교차편집하는 식으로 줏대 없이 카피된다. 

<강남 1970>은 오래된 한국 근대사를 다룬 영화이면서도, 아주 낡은 조폭 영화의 언어를 시대착오적으로 반복한 영화이기도하다. 빈약한 시나리오를 집단 패싸움의 스펙터클과 피튀기는 장면으로 눙치려 하는데 긴장감만 떨어진다. 그러니 격투신에서도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는 거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여러 인명이 계속 거론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누가 누구인지 계속 헷갈린다. 누구 누구편인지 이름으론 식별이 안되니까 관람자로서 피아식별도 정리가 잘 안된다. 영화 속에서 두 주연을 빼면 사실상 캐릭터가 분명하지 않아서 이런 혼선이 빚이지는 것 같다. 시사회 직후 간담회도 열렸지만 나는 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영화에 출연한 걸그룹 AOA의 설현(1995년생)도 간담회장에 나왔다고 하네. 


* 시사회장을 찾은 관람자들에게 홍보사측에서 부담스럽게 많은 경품을 나눠줬는데, 미안하게도 영화가 그런 성의표시에 미치질 못한다. 

2015년 1월 13일 화요일

받는 사람



봉투의 '받는 사람'란에 이렇게 장황하게 나를 풀이한 우편물은 처음 받아봤다.  
서울시립미술관이 보낸 개인정보 수집 동의서가 담긴 우편물에 저렇게 적혀 있길래 유심히 쳐다보다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2015년 1월 11일 일요일

명함이 말하는 과거사

명함은 상대방의 신상정보에 대한 약술이기보다, 대면할 때 주고 받는 거의 무의미한 세리모니의 흔적으로 남았다. 용도가 무의미한 지경이어서 2012년 신대방동을 떠날 때는 그간 받은 명함들을 산처럼 쌓고 '화형식'까지 치룬 적이 있다(엮인글). 
살던 집으로 돌아온 후 먼지 덮인 자료를 처분하는 중인데, 명함을 모아놓은 명함철이 2권이나 있다는 걸 알았다. 2000년대 초중반때 받아둔 명함을 모은 명함철이다. 추억이 밴 각별한 명함 서너 개를 빼곤 모두 처분할 생각으로 명함철을 빼뒀다. 그런데 선별할 명함을 고르려고 명함철을 넘기다가 예상 못한 재미를 발견했다.


1.  내가 당시 집중했던 일의 윤곽이 상대가 건넨 명함을 통해 환기되는 재미. 
=> 생계 때문에 2000년대 초반 외국인 민박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외국인 손님에서받은 명함이나 민박 관계자의 명함이 빼곡했다 
=> 2000년대 중반 영화에 관심을 둘 때 영화계 인사들에게서 받은 명함도 많았다.  

2.  인생의 굴곡과 변화를 겪은 상대의 인생사가 내게 준 명함으로 재확인되는 재미. 
=> 학위 파동으로 미술계를 떠난 신정아의 성곡미술관 시절 명함 
=> 정치인 입문 직후 공개석상에서 사인을 적어서 건네준 '개혁당' 국회의원 시절의 유시민 명함 
=> 아토마우스 로고와 개인 홈피를 인쇄한 이동기의 명함 
=> 직함을 무수히 바꾸다가 문득 극우파로 변신한 '빅뉴스'의 변씨의 명함'들' 
=> 작년말 해외에서 사망한 한겨레 구본준 기자의 한문으로 이름을 표기한 명함 
=> 그 밖에 지금은 다른 근무처와 직함을 쓰는 무수한 사람들의 전 직장, 전 직함이 적힌 고색창연한 명함....     

그래서 결론. 명함철에서 일부만 버리고 보관하기고. 오늘부터 받는 명함 중 일부는 명함철에 보관하기로.


2015년 1월 10일 토요일

Musical Fidelity A1



Pro-ject 1-Xpression Ⅲ 턴테이블 중고 매물을 장만했지만(엮인글), 음악을 들을 순 없었다. 왜냐하면 10여년 간 집에서 조용히 잠든 오디오 제품 대부분이 1992년에 구입했는데, 그 중 앰프 정도만 빼면 보급형에 가깝다. 더구나 노후한 상태 때문인지 모두 온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92년 장만한 오디오 세트의 구성은 이렇다.  

앰프: Musical Fidelity A1
턴테이블: Yamaha TT 400 
CD플레이어: JVC XL-Z 331 
스피커: Boston HD10 


내 Musical Fidelity A1 앰프는 단종된지 오래 되었다. 그렇지만 보유한 제품 가운데 앰프만 수리를 받아서 계속 사용할 생각이고, 나머지 제품은 모두 교체 할 계획이다. 얼마 전 수리를 맡긴 앰프 Musical Fidelity A1을 오늘 저녁 홍은동에서 받아왔다. 앰프의 수리와 전달까지 모두 작가 정재호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2015년 1월 9일 금요일

다윈주의 좌파



이사를 하면 사용하지 않고 무관심 속에 방치된 소지품들이 정리된다. 대부분은 버리게 되고, 용도가 있는 소지품은 찾아서 보게 된다.  <다윈의 대답 Darwinism Today>도 얇은 단행본 총 8권으로 구성된 전집인데, 방치 중인 옛 관심사였을 뿐이다. 방학 중 틈틈 읽으려고 선별한 책이다. 

<다윈의 대답> 전집 8권 중 가장 먼저 빼든 건 <다윈주의 좌파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동물해방>을 포함해서 동물보호운동의 최전선에 있는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썼는데, 좌파의 반복되는 실패 이유와 오늘날 진화론의 견지에서 좌파의 보완 점에 관해 간결하고 설득력 높은 문장으로 밝힌 책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경제적 토대가 사회의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아울러 우리의 의식을 결정"하므로,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고정된 인간 본성이란 없다."고 정통 좌파는 굳게 믿고 있으나,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 본성은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본질을 갖는다는 거다. 그래서 책 후반에서 피터 싱어는 이렇게 정리해준다.

"다윈주의 좌파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해서도, 인간의 본성이 원래 선한 것이라고 주장해서도,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무한히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다윈주의 좌파>는 다 읽었고, 다음 차례는 <낭만전사 - 여자는 왜 포르노보다 로맨스 소설에 끌리는가?> 

2015년 1월 8일 목요일

Pro-ject 1-Xpression Ⅲ



1월7일(수).

영화 <와일드> 시사회(엮인글)를 본 후, 소격동의 갤러리 스케이프 전시 오프닝엘 갔고, 뒷풀이 자리에서 21시까지 버티다가 나왔다. 홍은동에서 22시에 작가 정재호를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서다. 살던 집으로 돌아온 후 턴테이블로 10년 가까이 방치한 LP를 오랜만에 들으며 보내고 있는데, 이 턴테이블은 1992년 구입한 보급형 제품으로 하필 지난주에 고장이 났다.  수리해서 계속 쓰려고 하다가 이전보다는 상위기종으로 새로 구입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런데 쓸 만한 턴테이블 중고 매물이 내왔다고 아는 분이 알려줬는데, 물건을 내놓은 분이 경기도 의왕에 살아서 친절하게도 거기까지 정재호가 나를 태워주기로 해서 홍응동으로 22시에 둘이 만났다. 정재호는 오디오매니아여서 오디오정보에 굉장히 밝기 때문에 물건을 대신 봐주기로 한거다. 

내가 어제밤 중고로 구입한 턴테이블은 Pro-ject 1-Xpression Ⅲ. 체코 산으로 디자인과 기능 모두가 심플하다. 

0107 와일드 ★★★★

1월7일(수) 16시30분. 왕십리CGV  <와일드 Wild>(2014) 시사회.

별점: 





감동의 승부수를 실화에 기초한 스토리텔링에서 찾은 영화가 연초에 두 편 이상 개봉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엮인글)에 이어 어제 시사회로 본 <와일드>도 그랬다. 이 영화가 실화에 근거한 작품이라는 걸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올 때 알았고, 그 전까지 모른 채 봤다. 실제 인간승리 드라마를 허구적 시나리오로 다듬으면 감동의 밀도가 높아지고 관객의 동정표를 얻기 쉬워선지 영화 관계자들은 영화에 적합한 인간 승리 드라마를 찾는데 분주한 모양이다. 리즈 위더스푼이 연기한 셰릴 스트레이드는 멕시코 국경에서 미국의 서부를 종단하는 4,286km의 도보여행을 완수한 실존 여성으로, 이 영화의 근간이 된 그녀의 동명 자서전 <Wild: From Lost to Found on the Pacific Crest Trail>는 2012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베스트셀러였다.  


영화 <와일드>의 포인트를 압축하면 크게 넷. 

하나. 심리적으로 허물어진 자신을 일으키는 초강수로, 인체적 혹사를 자청하는 게 있다. 이는 결코 쉬운 결정도 쉽게 완수할 과제도 아니지만 예외없이 대단히 효과적인 처방일 수 있다. 인체 고난을 자처하는 건 미워진 자기 자신에 대한 자학적 처벌과 격려의 기능을 함께 수행할 수 있다.  
멕시코에서 미국을 종단하는 이 장거리 도보여행은 PCT라는 약칭으로 불리는데, 주인공 셰릴이 PCT의 초반에선 "도보하면서 매 2분마다 한번씩 포기를 생각 한다"고 고백할 만큼, 초반부에는 많이 흔들린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등단 초기에는 글을 쓰는 내내 "탈고 한다"와 "이러다 못 끝낼 지도 몰라" 사이를 오간다.   

둘. PCT의 초반부 고비를 넘기고 중간 쉼터에 셰리가 도착한 후, 다음 경로를 준비할 무렵 노련한 사람이 그녀에게 준 간단한 조언도 영화의 포인트다. 산더미같은 셰릴의 베낭에서 짐을 줄이라는 조언이다. 이제까지 사용하지 않고 다만 예비를 위해 준비한 물품을 과감히 버리라는 것.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짐의 무게를 줄이는 거에요."  일상생활에서도 통하는 공식. 그럼에도 지켜지기 힘든 공식.  

셋. 과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잊고 '현재에 머물고,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태도'. 대략 이런 내용의 문장이 영화 후반부에 나왔는데, 근래 읽은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Power of Now>에서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와 일치하는 것 같다. 나는 평소 이런 '영적 스승'들의 메시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정서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유념해야 할 지침이 된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넷. 셰릴이 PCT의 장거리 구간 곳곳에 마련된 방명록에 위인들이 남긴 말을 적는 장면이 나온다. 위인들의 말을 인용하는 행위는 자기를 격려하는 방법이고, PCT에 참여하는 익명의 도전자들에 대한 동지애와 배려이다. 위인들의 경구를 보고 읽는 건 자기를 격려하는 가장 친숙한 자기 주문 같다. 



* 감동 서비스의 효과는 궁지에 직면한 사람에게.  
* 친숙한 불편이 내게 있다. 이런 불편의 현명한 치유법은 그것의 제거이기보다 그것과 친숙해지는 것 같다.  

2015년 1월 7일 수요일

두부명란찌개



1월6일(화). 왕십리에서 시사회를 보고, 삼성동으로 이동해서 전시 하나를 보고, 자료 찾을 일이 생겨서 몇 달만에 대학 도서관을 찾았고 간 김에 저녁끼니를 학생 식당에서 해결했다.  메뉴는 두부명란찌개. 가격 2500원. 식당에서 나설 때 메뉴판에 적힌 칼로리를 확인하니 열량이 무려 800 kcal. 그렇지만 이 날의 첫 끼니였던 이 메뉴가 내 허기를 채워주진 못했다.

0106 존 윅 John Wick ★★☆

1월6일(화) 14시. 왕십리CGV  <존 윅 John Wick>(2014) 시사회.

별점: ★☆




해외 언론이 대체로 호평을 한 영화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다.  영화 평가에 대해 내가 너무 낡은 척도를 고집하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허구적 상상력의 허용치를 넘어서는 이야기 전개 만 따져도, 시나리오에선 얻을 점수가 없다. 해외에서 호평한 언론과 평론가의 짧은 촌평을 살피니, "기술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액션"이나, "경이로운 물리력과 절도있는 액션"등, 스토리에 관한 언급은 찾기 힘들다.  

키아누 리브스가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에서 수행했던 초월적인 액션들이, 현대적인 시공간에서 고스란히 이행이 된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단 말이지???   이 영화에선 <매트릭스>를 능가하는 정교하고 다층적인 액션이 펼쳐진다. 말하자면 초현대적 느와르랄까. 이런 어색한 설정이 영화라는 허구적 양해로 용인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그대로 쓴 영화 <존 윅>은 <매트릭스>라는 미래 세계에서 가능한 활극, 경찰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은 채 현대적 도시의 복판에서 총기를 난사하며 싸우는 <대부>의 20세기 초반 갱스터의 무법천지를, 아무 거리낌 없이 현대사회에 옮겨놓은 영화다. 이런 모든 활극이 일개인에 의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주인공 존 윅이 '모든 점에서 주변으로부터 완벽한 지원을 받을 만큼 전지전능한 영웅'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존 윅이 확인 사살하는 방식은 - 상대의 머리를 관통 시키는 - 속도감 있는 총기 난사 장면과, 인상적인 마천루의 도심 야경을 수직으로 내려본 항공 촬영 장면은 봐줄만 하다. 그렇지만 속도감 있고 기계적인 총격전과 난투극이 반복될 수록 관람의 긴장감은 떨어진다.  해외에서 <존 윅>을 호평한 단서가 진짜 전에 없이 속도감 있는 액션신이 전부 아닐까? 이거면 영화로서 충분한걸까? 


* 이런 초시대적인 활극을 호평하는 단서가 전에 없이 화려한 액션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영화를 보고 그 포인트를 발견한 분은 덧글 부탁한다. 

* 존 윅은 사랑 때문에 킬러라는 자신의 전업에서 물러난 전직 킬러다. 이런 설정은 사랑에 눈 떠서 마음이 흔들리는 어느 조폭 두목을 다룬 한국영화 <약속>이 떠오르기도 한다.